
최혜진 작가의 《에디토리얼 씽킹》은 제 삶의 수많은 정보와 경험을 어떻게 배치하고 해석할 것인지 깊이 고민하게 만든 책이었습니다. 복잡한 회사 업무와 가장으로서의 무게감 속에서 단순히 주어진 대로 반응하며 살아가던 저에게, 제 삶의 주도권을 쥐고 나만의 관점으로 하루를 기획하는 '편집자적 사고'의 필요성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앞으로는 회사 일에서도, 두 딸을 키우는 가정생활에서도 단순히 일상을 견디는 게 아니라 나만의 서사를 만들어가는 에디터의 시선으로 살아보려 합니다.
관점: 흩어진 일상을 하나의 기획으로 엮기
회사에서 매달 하는 업무 중 성과 보고서를 작성하거나 팀원들의 업무 상황을 점검할 때, 사실 저는 늘 '채우는 일'에만 급급했습니다. 윗선에서 내려오는 지침을 그대로 반영하고 쏟아지는 데이터를 화면 가득 집어넣어야 제대로 일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했습니다. 하지만 책에서 말하는 에디토리얼 씽킹은 단순히 정보를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시선으로 이 맥락들을 연결하고 잘라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합니다.
실제로 얼마 전 부서 내에서 신규 프로젝트 방향을 잡을 때의 일입니다. 다들 엄청난 양의 시장 조사 자료를 가져와 발표했지만, 정작 "그래서 우리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는 아무도 명쾌하게 답하지 못했습니다. 저 역시 예전 같았으면 그저 데이터의 오류나 빠진 항목만 지적하며 시간만 끌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난 뒤, 무수한 정보 속에서 본질이 아닌 것은 과감히 덜어내고 우리가 전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 하나만 남기는 작업을 시도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개념을 현실에 적용하면서 한 가지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책에서는 세련된 기획 기사를 쓰듯 삶과 업무를 멋지게 편집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매일 야근과 실적 압박에 시달리는 40대 직장인에게 '관점을 세우고 기획한다'는 것은 다소 한가한 소리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당장 내일 아침까지 보고서를 올려야 하는 급한 과제 앞에서 "나만의 관점이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할 여유는 현실적으로 부족합니다. 때로는 완성도 높은 기획보다 빠르게 처리하는 속도가 더 중요한 조직 문화 속에서, 기획자로서의 자아와 단순 노동자로서의 현실 사이의 갭은 생각보다 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만드는 보고서 한 장에 나만의 시선을 담으려는 최소한의 노력이 없다면, 저는 그저 회사의 거대한 톱니바퀴로만 남게 될 것이라는 냉정한 현실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덜어내기: 관계와 삶의 여백을 만드는 기술
책을 읽으며 가장 가슴에 박혔던 부분은 좋은 편집이란 '무엇을 더할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버릴 것인가'에 달려 있다는 대목이었습니다. 이 문장을 떠올리며 지난주 주말,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딸아이와 거실에 누워 시간을 보내던 때가 생각났습니다. 휴대폰으로는 계속해서 회사 업무 메일 알림이 울려대고 있었고, 머릿속은 다음 주에 있을 이사회 발표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몸은 아이들 곁에 있었지만 마음은 딴 곳에 가 있었던 셈입니다. 아내가 옆에서 "여보, 애들 이야기 좀 들어줘"라고 한마디 했을 때야 비로소 제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손에 쥔 채 아이들의 소중한 순간을 놓치고 있는지 깨달았습니다.
에디터가 잡지 한 면을 구성할 때 여백을 남기듯, 제 일상에도 과감한 '덜어내기'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날 이후 퇴근 후 집 문을 열기 전에는 회사 일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끄기로 저 스스로와 약속했습니다. 주말에는 아이들과 눈을 맞추며 노는 시간에 집중하고, 불필요한 스마트폰 확인을 줄였습니다. 신기하게도 제 마음에서 일에 대한 집착을 조금 덜어내자, 두 딸이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신나게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책에서 말하는 '여백의 미'나 '선택과 집중'을 실제 생활에 적용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제가 원하지 않아도 떠안아야 하는 원치 않는 관계와 거절하기 힘든 업무들이 수시로 찾아옵니다. 책에서는 마치 의지만 있으면 제 삶의 불필요한 요소들을 언제든 쳐낼 수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가장으로서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현실에서는 그 '버림'조차 커다란 용기와 대가를 요구합니다. 상사의 불필요한 호출을 칼같이 거절할 수 없고, 의미 없는 회식 자리를 매번 빠질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결국 삶을 편집한다는 것은 단순히 제 취향대로 버리는 것이 아니라, 버리지 못해 생기는 스트레스까지 감내하며 타협점을 찾아가는 지극히 현실적인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재구성: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나만의 맥락 찾기
나이가 40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저도 모르게 남들과 나를 비교하는 시간이 늘어났습니다. 친구 누구는 아파트를 사서 얼마를 벌었다느니, 누군가는 벌써 임원으로 승진했다느니 하는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답답해지곤 했습니다. 세상이 정해놓은 '성공'이라는 프레임에 제 삶을 자꾸 맞추려다 보니, 정작 제가 가진 가치나 성취는 보잘것없어 보였습니다. 《에디토리얼 씽킹》은 남들이 만들어 놓은 판에 끌려가지 말고, 제 삶의 수많은 조각들을 나만의 맥락으로 다시 '재구성'하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이 것을 통해 제 일상을 다시 바라보았습니다. 남들에 비해 비록 화려한 이력이나 거창한 자산은 없을지 몰라도, 매일 아침 성실하게 출근하는 저의 시간들, 저녁이면 온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된장찌개를 먹으며 웃을 수 있는 온기, 그리고 주말에 두 딸의 손을 잡고 집 앞 공원을 산책하는 소소한 일상들이 결코 가볍지 않은 가치로 다가왔습니다. 남들의 기준이라는 잣대를 치워버리고 나만의 시선으로 삶의 장면들을 다시 편집하니, 제가 걸어온 길들이 훨씬 다채롭고 의미 있게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다만, 이러한 '삶의 재구성'이라는 개념이 자칫하면 현실 도피나 자기 위안으로 흘러갈 수 있다는 점은 경계해야 합니다. 남들의 성공을 그저 '나와는 다른 기준'이라며 치부해 버리고 현실에 안주하는 명분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편집이 아니라 일종의 정신승리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책에서는 나만의 맥락을 만드는 과정의 아름다움을 강조하지만, 현실에서는 객관적인 성과나 타인의 평가를 완전히 무시한 채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회사라는 조직 안에서는 여전히 타인의 평가가 제 승진과 연봉을 결정짓고, 현실적인 경제적 조건이 제 가족의 울타리가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관적인 자기만족과 냉정한 현실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 즉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나만의 서사를 잃지 않는 아슬아슬한 줄타기야말로 우리 같은 직장인들에게 진짜 필요한 편집의 기술이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