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사 동기가 건강검진에서 혈압과 간 수치 이상 경고를 받은 지 얼마 안 됐을 때였습니다. 그 친구가 상무님의 갑작스러운 저녁 술자리 제안에 조금도 망설임 없이 "물론입니다!"라고 답하는 모습을 보고 저는 속으로 참 복잡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마주치는 이 충성과 생존 사이의 딜레마,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저도 오랫동안 고민을 해왔습니다.
충성 딜레마: 회사에 올인하는 전략이 왜 위험한가
회사 동기가 건강 위험 경고를 받은 직후에도 상무님의 호출에 즉각 응하는 행동이 단순히 무기력함이나 아부라고만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아이의 학원비, 대출 이자, 가족들의 생활비. 40대 가장에게 회사 내 인맥과 인사 고과는 단순한 직장 생활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 생계와 직결된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충성이 쌍방 계약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고용 계약은 본래 개인의 노동력 제공과 보상을 교환하는 것을 전제로 하지만, 실제 직장 생활에서는 여기에 감정적인 헌신과 개인적인 시간까지 포함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큰 문제는 여기서 이야기하는 고용 계약이란 단순히 월급과 업무의 교환이 아니라, 암묵적으로 충성심과 미래 보장까지 포함된다고 직원 쪽에서 믿어버리는 구조를 말하지만, 그 믿음이 깨지는 순간 배신감은 배가됩니다.
몇 년 후 그 상무님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저의 경험입니다만, 제가 참 좋아하고 열심히 따르던 직속 상사가 조직 개편 한 번에 자리를 잃으면서 그분에게 쏟았던 시간과 에너지가 허망하게 흩어진 적이 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회사에 대한 감정적 충성"과 "기능적 업무 수행"을 분리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국내 직장인의 평균 재직 기간과 이직 현황을 보면,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옛말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한국경영자총협회의 조사에 따르면 국내 대기업 근로자의 평균 근속연수는 약 9~10년 수준에 불과합니다(출처: 한국경영자총협회). 감정을 빼고, 기능적으로만 충성하는 태도가 가장 현실적인 타협점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중간관리자의 고립: 구조적 문제를 개인이 혼자 안고 있다
제 후배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40대 초반의 그 친구는 점심을 혼자 김밥과 라면으로 때우는 날이 많았습니다. 위에서는 꼰대 임원에게 치이고, 아래에서는 워라밸(Work-Life Balance)을 강하게 요구하는 젊은 팀원들의 눈치를 보느라 정작 본인 업무조차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양쪽 세대 간의 기준이 극명하게 달라 중간관리자는 양쪽 기준을 동시에 충족시키려는 불가능한 임무를 떠맡는 상황에 놓입니다.
그 후배는 "내가 모두를 만족시켜야 조직이 돌아간다"라고 당당하게 말했었습니다. 하지만 제 경험상 모두를 만족시키려는 시도는 결국 아무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조직 내 갈등을 혼자 해결하려는 태도는 사실 일종의 심리적 과부하(Psychological Overload)라고 하여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 이상의 정서적 그리고 인지적 부담이 지속적으로 쌓이는 상태를 자초하는 일입니다.
이 현상은 비단 그 후배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고용노동부의 직장 내 괴롭힘 및 조직 내 스트레스 관련 통계에 따르면, 국내 중간관리자급 직장인의 직무 스트레스 지수는 다른 직군 대비 눈에 띄게 높은 수준으로 나타납니다(출처: 고용노동부). 개인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세대 간 가치관 충돌이 고착화된 조직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 역시 중간 관리자로써 어느 정도의 기준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첫 번째로 내가 해결할 수 없는 갈등은 방치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로 타인의 감정에 대한 과도한 책임감을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 번째로 역할 수행과 감정적 소모는 철저히 분리해야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려는 건 미움받고 싶지 않은 마음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 방향으로 계속 가면 결국 가장 중요한 자기 자신을 잃게 됩니다.
업의 재정의: 명함이 있을 때 세상과 나를 연결하라
올해 52살이신 부장님이 항상 하시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명함을 내밀지 못하는 순간,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될 것 같아." 20년 가까이 관리직으로 살아온 분이 회사 밖의 자신을 전혀 그려보지 못한 채 퇴직을 앞두고 있는 모습은 솔직히 남 일 같지 않았습니다.
책에서 이야기하는 업의 재정의(Job Redefinition)는 단순히 이직이나 창업을 권유하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서 업의 재정의란 내가 지금 맡고 있는 직무(Job)의 테두리를 넘어, 내가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역할 전체를 새롭게 설계하는 사고방식을 말합니다. 인삼 제품을 파는 회사가 자신을 "인삼 판매업체"로만 정의하면 시장 점유율의 한계가 명확하지만, "건강 기능 식품" 영역 전체로 업을 확장하면 비타민 시장도, 건강 트레이너도 경쟁자이자 협력 가능한 존재가 됩니다.
제가 직접 이 관점을 적용해 보니, 제 역할을 회사 안의 직함으로만 보지 않게 됐습니다. 제가 지금 갖고 있는 기술과 경험이 어떤 맥락에서 다른 사람에게 가치를 줄 수 있는지를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직함은 회사에서 빌려준 것이고, 역량은 온전히 제 것이라는 인식의 전환이 생각보다 많은 것을 바꿔줬습니다.
언바운드 된 사고방식, 즉 기존의 틀에 얽매이지 않는 시각은 이상적인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개념이 권유하는 핵심이 "지금 당장 회사를 나오라"가 아니라 "명함이 있을 때, 세상과 나를 연결할 수 있는 능력을 미리 키워두라"는 메시지라고 해석합니다. 책에서 이야기하는 커리어 포트폴리오(Career Portfolio)라는 개념도 마찬가지입니다. 커리어 포트폴리오란 단일 직장 경력이 아니라 다양한 경험과 기술의 조합으로 자신의 시장 가치를 입증하는 방식을 뜻하며, 특히 40대 이후 직장인에게 필수적인 생존 전략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결국 저는 회사를 등지는 것보다 회사에 있는 동안 세상과 나를 연결할 수 있는 역량을 조금씩이라도 쌓아가는 것이 더 현실적인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동기의 건강 위험 경고, 후배의 고립, 부장님의 퇴직 공포. 이 세 가지는 사실 하나의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내 삶에 회사가 없으면 나는 어떤 사람인가?" 그 질문에 지금 당장 완벽한 답을 내놓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다만 그 질문을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나중엔 선택지가 없어질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