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저는 40대가 되면 공부에서 좀 자유로워질 줄 알았습니다. 입시도 끝났고, 취직도 했고, 이제 쌓아온 경험으로 어떻게 하면 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40대 중반에 들어서고 보니 오히려 더 막막해졌습니다. 조직에서의 수명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고, 무언가를 다시 준비해야 한다는 압박은 느끼는데, 정작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답답해하던 시간이 꽤 길었습니다.
직장인에서 직업인으로, 지금이 전환점입니다
제 주변 40대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문제가 있습니다. 회사 안에서는 어떻게든 버티는데, "직함을 떼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답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직업인이란 특정 조직에 소속된 '직장인'이 아니라, 조직을 떠나도 독립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퇴직 이후의 경로를 보면 이게 더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직접 목격한 케이스만 해도, 회사를 나온 후 마땅한 업을 찾지 못해 프랜차이즈 창업으로 방향을 튼 분들이 여럿 있었지만, 몇 년을 고생하다 결국 접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분들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조직 안에서는 업무만 했고, 스스로를 위한 공부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100세 시대라는 말이 실감 나는 건 통계를 보면 더 분명합니다. 실제로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2023년 기준 83.6세로, OECD 평균을 웃돌고 있습니다(출처: 통계청). 60세에 은퇴한다고 해도 20년 이상을 더 살아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그 긴 시간 동안 좋은 대학 졸업장이나 과거 직함이 얼마나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사실 그리 희망적이지는 않습니다.
요즘은 평생학습이라고 하여 학교 졸업 이후에도 생애 전반에 걸쳐 지속적으로 배우고 역량을 갱신해 나가는 과정을 자주 이야기합니다. 이 개념을 개인의 생존 전략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공부를 바라보는 시각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언제까지 공부해야 해?"가 아니라 "지금 무엇을 배워야 내 삶이 나아지지?"로 바뀌는 것입니다. 회사 이름과 직함을 뺐을 때,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전문성이 있는지, 지금 하는 공부는 조직을 위한 것인지, 나를 위한 것인지, 10년 뒤 새로운 분야에 도전할 수 있는 기초 역량이 쌓이고 있는지 충분히 고민하고 결정해야 하는 사항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물론 이 질문이 가혹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걸 저도 압니다. 당장 내일 마감해야 할 보고서와 인사고과가 급한 상황에서, 10년 뒤를 위한 공부를 하라는 말은 현실과 동떨어진 소리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생존을 위한 실무형 공부와 미래를 위한 본질적 공부 사이에서 시간을 어떻게 배분할지, 그 현실적 대안이 없다면 이 이야기는 그냥 한낯 이야기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합니다.
역멘토링, 후배에게 배우는 것이 생존 전략입니다
제가 점심시간을 활용해서 어린 후배 두세 명과 밥을 먹기 시작한 건 약 1년 전부터입니다. 처음에는 제가 뭔가 가르쳐주거나 조언해 줄 수 있다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는데, 막상 앉아서 대화를 나눠보니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그 친구들의 언어와 생각이 낯설게 느껴질 때가 훨씬 더 많았습니다. 어떨 때는 무슨 얘기인지 감도 안 잡히기도 했습니다.
최재천의 공부에서는 역멘토링(Reverse Mentoring)이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역멘토링이란 기존의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지식 전달 구조를 뒤집어, 젊은 세대가 윗세대에게 새로운 트렌드나 기술, 문화를 가르치는 방식을 말합니다. GE의 잭 웰치가 1999년에 처음 도입한 이후, 다양한 글로벌 기업에서 세대 간 소통 도구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최재천 교수는 내가 모든 것을 다 안다는 오만이 공부를 막고 관계를 망친다고 지적합니다. 저는 이 말에 크게 공감합니다. 회사에서 후배들과 갈등이 생기는 이유 대부분은, 서로가 서로의 언어를 배우려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윗세대가 "내가 해봤으니까 내가 더 알아"라는 태도를 내려놓지 않으면 대화 자체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는 짚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소통의 책임을 지나치게 윗세대의 '배움 부족'으로만 돌리는 시각은 좀 불공평하다고 봅니다. 수평적 소통을 강조하는 것은 좋지만, 한국 특유의 수직적 조직 구조에서 무조건적인 수평 문화를 강요하면 리더십 부재나 업무 효율 저하로 이어질 위험도 분명히 있습니다. 소통은 쌍방향입니다. 윗세대도 먼저 다가가는 노력이 필요하지만, 후배들 역시 본인들의 방식만 고집하지 않고 윗세대를 이해하려는 태도가 함께 있어야 진짜 소통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후배들과의 점심 자리에서 조금씩 관계의 벽이 허물어지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눈에 띄는 변화는 아니지만, 분명히 달라지고 있다는 걸 후배들의 표정과 이야기로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번아웃 직전에도 공부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
한국 직장인의 번아웃 수준은 상당히 심각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한국직업능력연구원에 따르면 국내 직장인의 절반 이상이 번아웃 증상을 경험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출처: 한국직업능력연구원).
저 역시 갑작스러운 야근, 경조사, 부모님 병원 동행, 아이 학교 행사까지 겹치는 날이면 퇴근 후 책을 펼칠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더 공부해야 한다, 더 노력해야 한다"라고 채찍질하는 말은 분명히 가혹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평상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정말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라는 말을 믿습니다. 번아웃이 오지 않도록 에너지를 관리하는 것 자체가 공부의 일부입니다. 매일 두 시간씩 억지로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게 아닙니다. 출퇴근 시간에 자기 계발 강의를 듣든, 점심시간에 관심 있는 유튜브 강의 하나를 보든, 그 작은 꾸준함의 누적이 10년 뒤를 바꾼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효능감(Self-Efficacy)이라는 심리학 개념이 있습니다. 이는 어떤 일을 수행할 수 있다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말하는데, 공부를 포기한 사람은 이 자기 효능감 자체가 무너집니다. 그 상태에서는 새로운 직업도, 새로운 관계도, 새로운 도전도 다 두렵게만 느껴집니다. 반대로 아주 작은 공부라도 꾸준히 이어가는 사람은 이 감각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지금 제가 직접 시도하고 있는 작은 루틴이 있습니다. 매일 아침 30분, 분야를 정하지 않고 그냥 궁금한 것 하나를 찾아 읽습니다. 어떤 날은 경제 기사, 어떤 날은 뇌과학 책, 어떤 날은 후배가 추천해 준 유튜브 채널입니다. 거창하게 하지는 못합니다. 다만 이게 반년 넘게 쌓이고 나니, 생각보다 쌓이는 것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40대의 공부는 입시 경쟁을 위한 것도, 승진을 위한 것도 아닙니다. 회사가 없어도 내가 서 있을 수 있는 자리를 만드는 과정입니다. 거창한 계획보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공부 하나를 시작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번아웃이 오기 전에, 직함이 사라지기 전에, 오늘 조금씩 움직이는 것이 10년 뒤의 격차를 만들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